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특유의 그 냄새가 있다.
플라스틱과 냉기가 섞인, 약간 비릿하고 약간 고요한 그 냄새. 오늘 저녁 뭘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문을 열고 서 있을 때, 형광등 불빛이 얼굴에 닿는 그 온도. 차갑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딱 애매하게 실온보다 낮은 그 느낌.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1인분을 위해 돌아가는 밥솥 소리가 부엌 구석에서 들렸다. 카운터 위에는 혼자 먹기 좋게 소분된 반찬 두 가지. 작은 그릇 하나. 젓가락 한 벌.
그 순간, 경이로움이라는 감정이 어디서 오는지 처음으로 이해했다.

42%라는 숫자가 왜 이렇게 낯선가
전체 가구의 42%. 지금 한국에서 혼자 사는 사람의 비율이다.(정책브리핑)
숫자만 보면 놀랍지 않다. 뉴스에서 워낙 많이 들어서 이제는 그냥 배경 소음처럼 흘러가는 종류의 통계. 그런데 이상하다. 저 숫자가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리는 아직도 혼자 밥 먹는 장면을 볼 때 "불쌍하다"고 느끼는 걸까.
레스토랑에 혼자 들어가면 직원이 잠깐 멈칫한다. 카페 1인석은 창가나 구석에 몰려 있다. 명절에 "올해는 혼자야?" 하고 물어보는 친척의 그 목소리 톤. 혼자라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낮추는 그 시선의 각도.
42%가 혼자 사는데, 혼자 있는 장면은 아직도 '결핍'의 이미지로 소비된다.
이건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다.
우리가 "혼자"라는 단어를 쓸 때, 그 단어 안에는 이미 누군가의 부재가 전제되어 있다. 원래 있어야 할 것이 빠진 상태. 완전한 것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상태. 그러니까 혼자 밥을 먹으면, 자동으로 "같이 먹을 사람이 없는" 것이 된다. 없는 것에 집중하는 언어 구조.
그런데 나는 그날 냉장고 앞에 서 있으면서 다른 걸 생각하고 있었다.
이 고요함이 꽤 괜찮다는 것.
식탁은 원래 두 명짜리가 아니었다
인류가 식사를 '함께' 하게 된 것은 분명 오래된 일이다. 불 주변에 모이고, 사냥한 것을 나누고, 공동체를 확인하는 의식으로 밥상이 기능했다. 이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용히 넘겨짚은 것이 하나 있다.
'함께 먹는 것'이 본질이라면, '혼자 먹는 것'은 일탈이어야 한다. 그 논리대로라면 역사 속에서 홀로 밥을 먹었던 모든 순간들 — 밭에서 일하다 혼자 싸온 도시락을 펼쳤던 사람, 상인이 숙소에서 홀로 저녁을 먹었던 밤, 새벽 기도 후 혼자 죽을 끓여 먹었던 사람 — 이 모두가 '불완전한' 식사였을까.
아닐 것이다. 그건 그냥 그 사람의 식사였다.
'혼자 먹는 것 = 외로운 것'이라는 등식은 생각보다 역사가 짧다. 핵가족 문화가 자리 잡고, 식탁이 가족의 단란함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광고와 드라마에 반복 노출된 것은 기껏해야 수십 년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공식이, 실은 아주 최근에 만들어진 이미지다.
그러니까 '혼자 밥 먹는 게 슬픈 일'이라는 통념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감각이 아니라 학습된 감각이라면?

반전: 고요함은 결핍이 아니라 정보다
이 에세이를 쓰기 전, 나는 당신이 공감 포인트를 기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혼자 밥 먹어도 괜찮아'라는 위로. '혼자만의 시간도 소중해'라는 자기계발식 결론. 그런데 이 에세이는 그쪽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위로는 이미 많고, 위로는 대체로 통념의 자리를 지킨다.
내가 흥미롭다고 느끼는 건 다른 지점이다.
1인 가구 배달 서비스에서 '최소 주문 금액 없는 1인분'이 출시 두 달 만에 이용자 100만 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정책브리핑) 이 숫자가 흥미로운 이유는 사람들이 '1인분을 먹고 싶었는데 못 먹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수요는 있었는데 시스템이 없었던 것. 혼자 밥 먹는 것을 사람들이 원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걸 위한 구조가 없었던 것.
그 구조가 생기자마자 100만 명이 움직였다.
이게 경이롭다. '혼자'가 결핍의 증거라면, 왜 저 사람들은 혼자를 선택하고 싶었을까. 외로움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선택한 건 외로움이 아니라는 얘기다.
혼자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내가 먹고 싶은 속도로, 내가 원하는 침묵 안에서 먹는다는 것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