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랍 안에 오래된 플레이리스트가 하나 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제목도 붙였다. 대문자로, 감탄부호도 달아서. 트랙을 추가할 때마다 그 곡이 내 가슴 어딘가를 건드렸기 때문에 넣었다. 어떤 곡은 버스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울 뻔 했고, 어떤 곡은 새벽 두 시에 이어폰을 꽂고 혼자 방 안을 빙빙 돌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리스트를 틀어도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곡은 정확히 예전과 같은 박자로 흐른다. 내 귀도 열려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이어폰을 낀 채 설거지를 하고, 볼륨을 올려보고, 다시 내린다. 노래가 끝났는지도 모른 채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한 다른 영상을 보고 있다.
나는 한동안 이걸 '식었다'고 불렀다. 좋아하던 게 식은 거라고.
식는다는 말이 얼마나 이상한 말인지
수원 어딘가에 파란 대문 집이 있다. 집주인 부부가 23년 동안 키워온 장미가 있는 집이다. 매일 아침 죽은 꽃잎을 털어내고, 가지를 다듬고, 화분 흙을 확인하며 돌봐온 장미. 그 장미가 최근 절도로 훼손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많은 사람들이 화를 냈다.
그런데 나는 그 뉴스를 읽다가 다른 생각에 걸렸다.
23년. 매일 아침.
23년 동안 매일 아침 장미 앞에 서는 사람에게, 장미는 아직도 설레는 존재일까? 아니면 이미 오래전에 설렘은 지나가고 다른 무언가가 남은 걸까? 두 번째라면, 그 두 번째 감정의 이름은 뭘까?
설렘이 아닌데도 매일 아침 대문을 열고 가위를 들고 나가는 그 동작.
나는 그걸 '식었다'고 부를 수 없다는 걸 그 순간 처음으로 느꼈다.
통념이 하나 있다
좋아하는 게 식으면, 그건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거라고.
설렘이 없어지면 감정도 없어진 거라고.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한다. "예전만큼 안 좋아하게 됐어." "처음 느낌이 없잖아." 마치 감정의 온도계처럼, 뜨거움이 사라지면 감정 자체가 증발한 것처럼 다룬다.
그런데 은마상가에서 수십 년간 동네 문방구를 운영하다 가게 문을 닫은 노부부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그 사장님은 가게 외벽에 손편지를 붙였다. 손글씨로, 단골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면서. 민찬이, 서원이, 준서, 성원이, 정한이, 정환이, 예준이. 잘생긴 서진이까지.
문방구를 처음 열었을 때의 두근거림이 수십 년 동안 그대로였을 리 없다. 계산대에 앉아 똑같은 동작으로 거스름돈을 세던 손의 감각은, 처음 그 가게를 열던 날의 흥분과는 완전히 다른 온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손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알 수 있다 — 그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설렘보다 훨씬 단단하고, 훨씬 무거운 무언가가.
설렘이 사라진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설렘이 자리를 비워주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걸 우리는 너무 오래 '식었다'는 단어 하나로 뭉개버렸다.
뒤집힌다, 예상과 반대로

나는 처음에 이 글을 다르게 쓰려고 했다.
권태에 대한 글, 좋아하던 것이 더 이상 설레지 않을 때의 글. 당연히 방향은 이쪽이라고 생각했다 — 그래도 괜찮다고, 다시 찾으면 된다고, 새로운 걸 찾아라고. 독자를 어루만지고 위로하고 다독이는 글.
그런데 쓰다 보니 자꾸 다른 문장이 먼저 나온다.
설렘이 없어진 게 정말 문제인 건지.
우리가 설렘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설렘은 사실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지, 관계의 본체가 아니다. 신호탄은 하늘에서 빛나고 소리를 내고 사라진다. 그 이후 남은 것들이 실제 관계를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신호탄이 사라지고 나면 "불꽃이 없어졌다"고 말하며 손을 놓는다.
처음 그 리스트의 곡들이 나를 울게 만들었을 때, 나는 그 감정이 진짜라고 생각했다. 지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 나는 그 감정이 거짓이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혹시 순서가 반대 아닐까. 지금 이 고요함이 더 정직한 감각일 수도 있다. 처음의 흥분이 오히려 노이즈였을 수도 있다.
사랑 고백을 받은 날 가슴이 쿵쾅거리는 사람과, 20년을 함께 살다 아침마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온도의 커피를 내리는 사람 — 어느 쪽이 더 깊이 느끼고 있는 걸까.
우리는 전자를 선망하고, 후자를 '익숙해진 것'이라고 부른다.
이 문장이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 아니, 이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조금 잔인한 말이다. 우리가 깊어지는 감정에 '권태'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는 게.
식었다는 말 대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좋아하던 것이 더 이상 설레지 않을 때, 그게 식은 게 아닐 수 있다. 감정이 형태를 바꾼 것일 수 있다. 뜨겁게 들끓던 게 가라앉아서 투명해진 것. 그리고 투명해진 것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착각한다.
23년간 매일 아침 장미를 다듬은 손이 그 장미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 그 손의 주인은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예전만큼 두근거리지 않네"라고 중얼거렸을까.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착한 사람이 참아야 한다는 말, 나는 그게 늘 이상했다는 글에서도 잠깐 스쳤던 이야기인데 — 우리는 감정을 너무 극적인 순간으로만 인식하는 습관이 있다. 터지거나, 울거나, 혹은 완전히 사라지거나. 그 사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지속되고 있는 감정들은 감정 취급을 못 받는다.
그 조용함이 권태인지, 깊이인지. 그걸 어떻게 구분하냐고?
나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이 글의 결론이 아니다.
오늘 밤 당신이 꺼낼 플레이리스트
다시, 그 서랍 안 플레이리스트로 돌아간다.
오늘도 틀었다. 첫 번째 트랙이 흘러나오고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설거지를 하고, 물 온도를 조절하고, 거품을 헹군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두었다. 끄지 않았다. 볼륨을 올리지도, 내리지도 않았다. 그냥 흘러가게.
나는 이걸 '식었다'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아직 이름은 없다. 그냥, 다른 무언가다.
파란 대문 안쪽의 그 장미도, 손편지에 이름이 적힌 그 아이들도 아마 비슷한 무언가 안에 있었을 것이다. 설렘은 지나갔지만 손은 계속 움직였던, 그 이름 붙이기 어려운 지속.
당신의 서랍 안에는 어떤 플레이리스트가 들어 있나요. 오늘 밤 그걸 꺼내서 끄지 않고 끝까지 틀어본다면 — 그 곡들은 아직도 당신 안에 있는 걸까요, 아니면 당신이 달라진 걸까요.
📎 참고한 자료
- 은마상가 노부부 문방구 폐업 손편지 화제 — 파이낸셜뉴스 등
- 수원 파란대문 집 23년 장미 절도 피해 — 경인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