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특유의 그 냄새가 있다. 플라스틱과 냉기가 섞인, 약간 비릿하고 약간 고요한 그 냄새. 오늘 저녁 뭘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문을 열고 서 있을 때, 형광등 불빛이 얼굴에 닿는 그 온도. 차갑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딱 애매하게 실온보다 낮은 그 느낌.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1인분을 위해 돌아가는 밥솥 소리가 부엌 구석에서 들렸다. 카운터 위에는 혼자 먹기 좋게 소분된 반찬 두 가지. 작은 그릇 하나. 젓가락 한 벌. 그 순간, 경이로움이라는 감정이 어디서 오는지 처음으로 이해했다. -

냉장고 앞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손에 쥔 음료수 뚜껑을 끝까지 돌리지 못했다. 뚜껑이 반쯤 열린 채로 멈췄고, 캔 안의 탄산이 희미하게 치익— 소리를 냈다. 상대는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소리만 듣고 있었다. 탄산이 빠져나가는 소리. 내가 오랫동안 '배려'라고 불러온 것이 실은 압력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 공기 중에 떠 있었고, 나는 그걸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논리가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갑자기 그 논리를 믿을 수 없게 됐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위한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좋은 의도"...

서랍 안에 오래된 플레이리스트가 하나 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제목도 붙였다. 대문자로, 감탄부호도 달아서. 트랙을 추가할 때마다 그 곡이 내 가슴 어딘가를 건드렸기 때문에 넣었다. 어떤 곡은 버스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울 뻔 했고, 어떤 곡은 새벽 두 시에 이어폰을 꽂고 혼자 방 안을 빙빙 돌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리스트를 틀어도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곡은 정확히 예전과 같은 박자로 흐른다. 내 귀도 열려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이어폰을 낀 채 설거지를 하고, 볼륨을 올려보고, 다

--- 손등에 햇볕이 닿는 각도가 있다. 여름 오후 세 시쯤, 창문을 반쯤 열었을 때 들어오는 그 빛. 손목에서 손가락 두 번째 마디 사이에만 정확히 걸리는, 뜨겁지는 않고 따뜻한 빛. 어릴 때 살던 집 마루에 누워 그 빛을 받으며 아무 생각도 안 하던 어느 오후가 내 몸 어딘가에 박혀 있다. 지금도 그 각도로 햇볕이 들어오면 나는 1초쯤, 잠깐 어딘가로 돌아간다. 돌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채로 그냥 현재에 서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리움이라고 부른다. 나는 오랫동안 그리움이란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감정'이라고 믿었다. 그 집,

찻잔을 들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아주 가득 채워진 찻잔을, 쏟지 않으려고 천천히 들어야 할 때의 그 감각. 손에 힘을 빼면 안 되고, 호흡을 고르고, 팔꿈치를 몸통에 붙이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 이게 왜 내 일이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 넘치도록 채워 놓은 건 내가 아닌데, 쏟지 않아야 하는 책임은 왜 나한테 있는 건지. 그 감각이 어릴 때부터 이미 익숙했다. "착한 아이는 참는 아이"라는 말의 뒷면 나는 꽤 일찍부터 '참는 것'이 미덕으로 통한다는 걸 배웠다. 밥상에서 내가 원하는 걸 먼저 집으면 안 됐고,...

오후 두 시, 카페 창가 자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에 물방울이 맺히고, 그게 천천히 흘러내리는 걸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는데 — 그냥 그 물방울이 어디서 끊길지를 눈으로 쫓고 있었는데 — 갑자기 심장이 한 박자 빨라졌다. 이유가 없었다. 아무 알림도 없었고, 누가 오는 것도 아니었고, 그날 특별히 좋은 일이 예정돼 있지도 않았다. 그냥, 물방울 하나. 그 기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 "준비가 됐을 때 시작하면 된다"는 말의 정체 우리는 설렘을 신호로 읽는다. 좋은 일이 생기려나...

오후 11시 47분의 커서 모니터 불빛이 얼굴에 닿는 온도가 있다. 열기라기엔 너무 약하고, 냉기라기엔 너무 미지근한, 그 어정쩡한 온도. 손목은 마우스 패드 위에 축 늘어져 있고, 빈 문서의 커서가 깜빡깜빡 — 1초에 한 번씩 — 뭔가를 치라고 재촉하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시다 만 아메리카노는 이미 미지근해졌다. 얼음이 다 녹아서 수면에 기름막처럼 커피 얼룩이 번져있다. 그 컵을 집어들기도 귀찮다. 그래도 나는 창을 닫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내일 뒤처질 것 같기 때문이다. 정...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말로, 아무것도. 커피는 식어가고, 화면은 켜져 있지만 아무것도 타이핑하지 않고, 창밖에는 퇴근하는 사람들이 작은 점처럼 흘러간다. 그 점들을 따라가다가 문득 깨달았다 —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게 슬프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이었다. 5월의 마지막 주, 바람은 막 더위를 예고하기 시작했고, 하늘은 그 유명한 보랏빛 그러데이션을 아낌없이 펼쳐두었다. 나는 베레모를 쓴 채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있었고, 아무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고, 나도 아무에게도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