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후 두 시, 카페 창가 자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에 물방울이 맺히고, 그게 천천히 흘러내리는 걸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는데 — 그냥 그 물방울이 어디서 끊길지를 눈으로 쫓고 있었는데 — 갑자기 심장이 한 박자 빨라졌다. 이유가 없었다. 아무 알림도 없었고, 누가 오는 것도 아니었고, 그날 특별히 좋은 일이 예정돼 있지도 않았다. 그냥, 물방울 하나.
그 기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준비가 됐을 때 시작하면 된다"는 말의 정체
우리는 설렘을 신호로 읽는다. 좋은 일이 생기려나, 뭔가 시작되려나. 그래서 설렘을 느끼면 무의식적으로 그 대상을 찾는다. 왜 설레지? 무슨 일이지? 이유를 붙여서, 이 감정이 어떤 준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트렌드 코리아 2026이 주목한 '레디코어' — 젊은 세대가 노션과 엑셀로 인생 전체를 설계하고, 예행연습의 예행연습까지 해두는 현상 — 를 읽었을 때 나는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준비가 돼야 시작할 수 있지. 근거 없이 뛰어들면 상처받으니까.
그런데 그 카페에서 물방울을 보다가 이유 없이 설렜던 그 순간을 돌이켜보면,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계획이 없었고, 목적지가 없었고, 다음 단계를 몰랐다. 그냥 설렜다.
그리고 그게 아마, 가장 순수한 버전이었을 것이다.
설렘에 이유를 붙이는 순간, 설렘이 사라진다

준비가 충분히 됐을 때 설레야 한다고 배웠다. 스펙을 쌓고, 돈을 모으고, 타이밍을 재고, 리스크를 계산하고 — 그다음에 설레야 '진짜' 설렘이라고. 이유 없는 설렘은 어딘가 철없는 것, 감당 못 할 감정처럼 취급된다.
그래서 우리는 설레는 것에 이유를 만들어 붙인다. 이 설렘은 저 사람 때문이야, 저 기회 때문이야, 드디어 준비가 됐기 때문이야. 감정에 근거를 달아서 정당화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이유를 붙이고 나면 그 설렘이 — 미묘하게 다른 것이 된다. 설렘이 아니라 기대가 되고, 기대는 결과를 요구하고, 결과가 없으면 실망이 된다. 이유를 붙이는 순간 설렘은 어떤 거래의 보증금이 되어버린다.
물방울을 보며 설렜던 그 이십 초. 이유가 없어서, 오히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빨라진 심장이 그냥 빨라진 채로 있어도 됐다.
1.5가구가 알고 있는 것
완전히 혼자이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함께이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 트렌드 코리아 2026이 '1.5가구'라고 부른 이 현상 — 혼자 살지만 느슨한 연대를 원하는 사람들 — 을 보면서 나는 다른 걸 읽었다.
이 사람들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1인 가구도 아니고 2인 가구도 아닌, 딱 어중간한 1.5. 어딘가 준비가 덜 된 것처럼 보이는 숫자인데, 이 사람들은 그 불완전한 상태를 '과도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금 이게 내 형태야, 라고 말한다.
설렘도 그런 것 아닐까. 무언가의 신호가 아닌, 그냥 그 자체. 준비된 설렘이 아니어도, 이유가 명확하지 않아도, 그 감정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 그 상태로도 완전할 수 있다는 것.
레디코어가 예행연습의 예행연습을 하는 동안, 설렘은 아무 예고 없이 물방울 하나를 타고 흘러내린다.
통념이 무너지는 자리
준비가 다 됐을 때 시작하는 사람이, 그 사이에 몇 번의 설렘을 통과 의례처럼 흘려보냈을지.
'준비된 설렘만이 진짜다'라는 통념은 사실 설렘을 도구로 만든다. 설렘을 어딘가에 쓰기 위한 연료로. 하지만 연료는 타야만 의미가 있고, 타지 않은 연료는 그냥 낭비로 취급된다.
그런데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에 소모되어야 의미가 생기는 것이 얼마나 될까. 슬픔이 극복되어야만 의미가 생기는 건 아니듯이. 설렘도 어딘가에 쓰여야만 의미가 생기는 건 아닐 텐데.
이유 없는 설렘을 느낀 적이 있다면 — 지하철 문이 열리는 순간이라든가, 오래된 노래를 우연히 들었다든가, 아무것도 아닌 냄새가 갑자기 코에 닿았다든가 — 당신은 그 설렘에 무슨 이유를 붙였나.
아니면 그냥, 잠깐 그 자리에 멈춰서 빨라진 심장을 들었나.
그 카페에서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다 마시고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물방울은 잔 아래까지 흘러내려 이미 고여 있었다. 설렘의 이유를 끝내 찾지 못했고, 찾지 않기로 했다. 뭔가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기 전에, 그 감정이 이미 제 속도로 흘러가 버렸으니까.
당신의 마지막 이유 없는 설렘은, 지금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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