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다섯 시 반. 알람이 울리기 십오 분 전에 눈이 떠졌다. 천장을 보는데, 뭔가 이상하다. 무너진 건 없다. 아무 일도 없다. 어제 저녁도 무난했고, 내일 일정도 특별히 무섭지 않다. 그런데 이 묵직함은 뭔가. 이불 안이 너무 따뜻해서 오히려 불편한 것 같은, 숨이 살짝 짧은 것 같은.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것 같은 느낌. 손을 이불 위에 올려두고 천장의 작은 얼룩을 본다. 저 얼룩, 지난달에도 있었나?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를 달랜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일어나면 돼. 그리고 그 달램이 아무 이유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불안을 — '별것 아닌 것'으로 정리해버린다.
나는 그 정리 방식에 오래 의심을 품어왔다.
"이유 없는 불안"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례한지
우리가 불안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상한 전제가 하나 붙어 있다. 불안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유를 찾지 못하면, 그건 '예민한 것' 혹은 '그냥 피곤한 것'으로 분류된다. 다시 말해서 — 근거 없는 불안은 신빙성이 없다는 뜻이다.
이 논리는 꽤 폭력적이다.
왜 폭력적이냐면, 몸이 먼저 안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유를 말로 설명할 수 있을 즈음에는, 사실 그 상황이 이미 한참 진행된 경우가 많다. 직장에서 뭔가 이상해졌다는 걸 '이직을 결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언어화하기 전에, 몸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관계가 끝날 것 같다는 걸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 번호가 뜨면 전화를 받기 싫어졌던 것처럼.
불안은 이유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유보다 먼저 온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이유로 불안한 거야?"라는 질문 앞에서, 그 선발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려보내버린다.
이유를 모르면 불안도 없는 건가요? 아니면 이유를 모르면 불안하면 안 되는 건가요?
불안을 관리하라는 말 속에 숨은 것
요즘 불안을 다루는 방식에는 공통된 키워드가 있다. 루틴. 마음챙김. 호흡. 디지털 디톡스. 수면 위생. 이것들이 나쁜 건 아니다. 실제로 효과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목록들이 가만히 전달하는 메시지가 있다. 불안은 관리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 줄여야 하고, 억눌러야 하고, 없애야 하는.

여기서 나는 살짝 뒤집어보고 싶다. 불안이 나쁜 신호라는 통념 말이다.
불안을 관리 대상으로 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전달하려는 정보에 귀를 닫는다. 연기 감지기가 울렸을 때 건전지를 빼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소리는 사라졌지만, 연기는 여전히 있다.
이유를 모르는 불안이라고 해서, 근거 없는 불안인 건 아니다. 뇌가 아직 언어로 번역하지 못한 어떤 신호일 수 있다. 몸이 이미 눈치챈 무언가를 의식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일 수 있다. 오히려 그 불안은 아주 성실하게, 지금 이 상황을 감지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착한 사람이 참아야 한다는 말, 나는 그게 늘 이상했다 — 이 글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건드렸는데, 우리는 너무 자주 "이러면 안 되는데"를 먼저 꺼낸다. 감정을 검열하는 습관. 불안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느낌은 뭘 말하고 있는 걸까
다시 새벽 다섯 시 반으로 돌아간다. 이불 속.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것 같은 그 느낌.
그걸 달래지 않고 한번 따라가보면 어떨까. 이유를 찾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그 감각에 잠깐 머무는 것. 무거운 건 어디서 오는 것 같나. 오늘의 일정인가, 어제 나눈 대화인가, 아니면 좀 더 오래된 어떤 것인가.
대부분은 거기서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 나오지 않아도 된다.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게, 불안이 틀렸다는 증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 불안은 설명이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것에 가깝다. 어디를 더 보라는, 어디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이 없는 안내판.
그걸 관리하고 줄이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안내판을 허물어버리는 셈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