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안에 있던 것들이 멀쩡했다.
정전이 네 시간 넘게 이어졌는데도, 냉동칸 가장자리에 쌓아둔 얼음이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건드려보니 표면이 축축했고, 눌리는 느낌이 왔다. 이미 조금 녹아있었다. 조금 더, 딱 한 시간만 더 늦었으면 다 망가졌을 텐데. 그 순간 나는 뭔가를 해냈다는 얼굴로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런데 내가 한 게 뭐였지?

내가 했다고 착각한 것들
위기라고 부를 만한 일들을 돌아보면, 내가 이겨낸 것들의 절반쯤은 사실 그냥 지나갔다는 쪽이 정확하다. 폭풍이 왼쪽으로 틀었고, 사람이 고개를 돌렸고, 타이밍이 한 박자 늦었다. 내가 버텼다기보다 — 구조물 자체가 무너지지 않았다.
그걸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뒤늦게 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깨달음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찜찜하고, 후회라고 부르기엔 아직 그때의 안도가 남아 있어서. 딱 그 중간 어딘가에 멍하니 서 있는 느낌. 냉장고 안 음식이 망가지지 않은 게 아니라, 망가지기 직전이었다는 걸 뒤늦게 확인하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그때 정말 무언가를 했는가, 아니면 그냥 그 시간 안에 있었는가.
위기 극복 명언이 불편한 이유
"당신의 가장 큰 위험은 실패가 아니라, 너무 낮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 미켈란젤로의 말이라고들 한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위기 극복에 관한 명언들은 대개 그 위기를 겪은 사람이 '이겨낸 뒤'에 한 말이다. 이겨낸 다음의 언어는 언제나 깔끔하다. 뒤에서 읽으면 전부 필연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 있을 때는, 명언을 떠올릴 정신이 없다. 손이 떨리고, 위장이 조인다.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내 몸의 반응이 먼저다.
헬렌 켈러가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내는 것들로도 가득하다"고 했을 때, 그 말이 아름다운 건 그녀가 실제로 이겨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 이겨낸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냥 지금 여기 있다. 그것만 확실하다.
명언이 불편한 건, 그 말들이 틀려서가 아니다. 너무 단정해서다. 위기 앞에서 인간은 그렇게 단정하지 않다. 손이 차가워지고, 숨이 얕아진다. 명언을 검색하는 대신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한다.
위기 극복 사자성어가 말하지 않는 것
고진감래(苦盡甘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이 말을 처음 배웠을 때, 나는 순서가 있다고 믿었다. 고통이 먼저이고, 달콤함이 나중이라는 일종의 약속처럼. 그러니까 지금 힘들면, 나중엔 괜찮아진다는.
그런데 고통이 얼마나 지속되면 '다한' 것인지, 거기에 대한 기준이 없다. 어디서부터가 끝인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이 내게 "이 정도면 충분히 쓴 맛을 봤으니 이제 단 맛 차례다"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고통이 끝난 게 아니라 그냥 어느 순간부터 덜 아프게 됐다는 걸 한참 뒤에 돌아보고서야 알아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화가 복이 된다.
이 말도 마찬가지다. 화가 복이 되는 과정은, 사실 복이 와서 화를 '위복'으로 '재명명'하는 것에 가깝다. 그 이전까지 화는 그냥 화다. 좋은 결과가 따라오지 않으면, 화는 화로 끝난다. 아무도 그 경우에 대해서는 사자성어를 만들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말들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다.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것이 인간이니까. 뚜렷한 논리보다, 말의 리듬이 더 위로가 될 때가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위로가 진짜가 되려면 — 결과가 먼저 와야 한다. 말은 항상 뒤에서 설명한다.

뒤늦은 깨달음 — 그리고 내 부끄러운 고백
여기서부터가 진짜 고백이다.
나는 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 경험을 누군가에게 말할 때, 조금 더 용감하게 들리는 버전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어떻게 버텼는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판단이 옳았다는 걸 결과가 증명했노라고. 마치 나에게 주인공의 자리가 있었던 것처럼.
그런데 뒤에서 돌아보면, 나는 그때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있었고, 일단 내일까지만 버텨보자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게 전부였다. 용기 있는 선택도, 현명한 판단도 아니었다. 그냥 시간이 흘렀고, 나는 그 시간 안에서 쓰러지지 않았다. 그게 다였다.
뒤늦은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이겨낸 게 아니라, 그냥 그 시간을 지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돌아보면서 '이게 극복이었어'라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
이름을 붙이고 나면, 내가 그 이름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극복의 서사를 소유하게 된 것처럼.
그리움은 과거에 있지 않다는 글을 쓸 때도 비슷한 감각이었다. 기억은 원래 형태 그대로 저장되지 않는다. 돌아볼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내가 버텼다는 기억도, 어쩌면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붙여준 각색일지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 나는 그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어진다. 왜냐면 그 이야기 속에서 내가 조금 더 나아 보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단단했고, 조금 더 의연했고, 조금 더 맞게 살았던 것처럼.
이게 자기기만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 그게 나의 부끄러움이다
좋아하던 것이 시들해졌다면, 그게 식은 게 아닐 수도 있다에서 결국 하고 싶었던 말도 이것과 닿아있었다. 우리는 감각이 변한 걸 설명하기 위해, 과거를 다시 쓴다. 극복의 경험도 그런 방식으로 생산된다.
위기는 내가 이긴 게 아니었다 — 그런데도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냉장고 안 얼음이 녹지 않은 건 운이었다. 하지만 그 냉장고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얼음을 눌러보고, 살았네, 라고 중얼거린 건 내가 했다.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보이지만 — 거기 있었다. 그 시간을 지나는 동안, 몸을 가누고 있었다.
그게 극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 구분 자체가 뒤에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다만 나는 이걸 고백하고 싶었다. 내가 위기를 이겨냈다고 말할 때마다, 그 말이 얼마나 뻔뻔한지를 나는 알고 있다는 것. 알면서도 계속 그렇게 말하고 싶어진다는 것.
지금 당신도 어떤 위기 앞에 있거나, 이미 지나온 자리에 서 있다면 — 한번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이겨낸 그 순간에, 당신은 정확히 무엇을 했나요?
📎 참고한 자료
- 미켈란젤로의 목표에 관한 인용구 (일반적으로 알려진 명언)
- 헬렌 켈러의 고통과 극복에 관한 인용구 (일반적으로 알려진 명언)
- 고진감래(苦盡甘來), 전화위복(轉禍爲福) — 한국 전통 사자성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