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뒷자리에서 뭔가 툭 하고 어깨에 닿았다.
손수건이었다. 하얀 면 소재에, 모서리에 작은 체크 무늬가 있는. 6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 먼저 말을 걸었다. "눈물 흘리셨잖아요." 나는 그때 이어폰을 끼고 있었고,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었고, 내가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울고 있었다. 지하철역 환승 구간에서 받은 전화 한 통이 아직 귓속에서 식지 않았던 것이다. 그 손수건은 따뜻했다. 방금 누군가의 손 안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체온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손수건을 받았다. 고맙다고 했고,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그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 내렸을 때 그 여성은 이미 창밖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돌려드리지 못했다. 아마 돌려드릴 생각도 제대로 못 했다. 나는 그날의 일을, 한동안 '세상이 이렇게 따뜻할 때도 있구나'라는 방식으로 기억했다.
그게 첫 번째 오해였다.
낯선 다정함이 가장 쉽게 들어오는 이유
다정함은 거리가 있을수록 순도가 높아진다. 이건 조금 이상하게 들리지만, 자꾸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면 오히려 자명해진다. 가까운 사람이 건네는 위로에는 늘 맥락이 있다.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한 상대의 해석이 섞여 있고, 거기에 대한 나의 해명이 필요할 때도 있고, 그 관계의 이력이 위로 안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버스에서 만난 낯선 사람은 그런 것들을 전혀 모른 채 그냥 손수건을 내밀 수 있다.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정확하게 닿는 것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관계'에 대한 언급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조사에 따르면 공감·관계와 관련된 콘텐츠 언급량이 전년 대비 약 20%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 수치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것을 '우리가 연결을 원하는 시대'라는 식으로 읽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게 읽힌다. 사람들이 관계를 더 많이 말한다는 것이 곧 관계 안에서 더 잘 위로받고 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말로 꺼내는 빈도가 높아진 것은, 실제로 그것이 충족되지 않아서 계속 언급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낯선 사람의 손수건은 왜 그렇게 깊이 들어왔을까. 아마 그것이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대도 없고, 지속성도 없고, 나를 이해하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자리에서, 눈물이 흐르는 사람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손수건을 꺼낸 것뿐이다. 그건 관계라기보다는 반사에 가깝다. 손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나는 한동안 그 '반사'가 이 시대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다정함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두 번째 오해였다.
1인 경제가 만든 것은 고독이 아니라 민감도였다
요즘 '1인분 서비스'가 이용자 100만 명을 넘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소 주문 금액 없이 혼자 먹고, 혼자 쓰고, 혼자 결제하는 방식이 일상이 된 것이다. 이걸 보통은 고독의 확산으로 읽는다.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졌고, 관계가 줄었고, 각자도생의 사회가 됐다고.
그런데 나는 반대로 읽고 싶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진 사람은, 타인의 아주 작은 신호에 더 잘 반응하게 된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이 계산대에서 직원이 건네는 말 한마디를 더 오래 기억하는 것처럼. 혼자 밥 먹는 것이 외로운 일이냐고 묻는 질문보다, 혼자 지내는 일상이 사람을 어디에 더 민감하게 만드는가, 라는 질문이 내게는 더 흥미롭다. 1인 경제가 만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감도(感度)의 상승이었을지도 모른다. 노이즈가 줄어들면 작은 신호가 더 크게 들린다. 혼자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낯선 다정함 하나가 하루 전체를 바꿔버릴 수 있다.
버스 안의 그 손수건이 나에게 그렇게 들어왔던 것도 아마 그 이유였다.
나는 그날, 이미 충분히 혼자였다.
반전: 손수건은 나를 따뜻하게 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장면을 말해야 한다.
나는 그 손수건을 집에 가져갔다. 세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딘가 돌려드려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야 알아챘다. 나는 그 손수건을 서랍 안에 넣어두고,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세탁도 안 했다. 누군가에게 돌려줄 방법도 없었지만, 사실 그 물건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게 불편했다.
따뜻함을 받았다고 기억했는데, 사실 나는 그 따뜻함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랍 안에서, 아직도 그 사람의 체온을 유지하는 척하고 있는 면 소재의 천 조각. 나는 그것을 버리지도, 사용하지도, 돌려드리지도 못한 채 그냥 두었다.
그 손수건은 나를 따뜻하게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나를 따뜻하게 한 것은 손수건이 아니라 그 장면이었다. '이런 사람이 있구나'라는 장면. 그리고 나는 그 장면을 마음에 간직했을 뿐, 실제로 건네받은 물건은 다루지 못했다.
이게 내가 낯선 다정함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그것을 받을 준비가 없었다. 나는 그 다정함을 하나의 감동적인 장면으로 박제했고, 실제 물질로 온 그것은 서랍 안에서 처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따뜻하다는 감정을 즉각 소비했지만, 그 다정함이 실제로 요구하는 것 — 손수건을 세탁하고, 사용하고, 혹은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 — 은 감당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