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가락 관절이 뻑뻑하다. 마우스를 쥔 채로 몇 시간이 지났는지, 창밖이 언제 어두워졌는지 모른다. 목 뒤쪽에 열이 몰려있고, 눈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건조하다. 물 한 잔 마시러 일어나려다가, 슬랙 알림이 하나 더 뜨는 걸 보고 다시 앉는다. 마실 물은 잠깐이면 되니까. 이 메시지는 지금 답해야 하니까.
그 '지금'이 세 시간째 이어지고 있다.
피로를 느끼는 건데, 왜 죄책감도 같이 오는 걸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묘하게 불편해진다. 생각의 꼬리가 자동으로 달린다. 이 정도로 지쳤다고 하면 나약한 건 아닌가. 아직 할 게 남았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잘만 하는 것 같은데.
피로는 몸에 오는데, 죄책감은 머리에서 온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죄책감이 더 무겁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조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쳤다는 건 신호잖아. 몸이 보내는 아주 직접적인 메시지. 근데 왜 그 신호를 받으면 "나 좀 쉬어야겠다"가 아니라 "나 왜 이리 약하지?"로 먼저 가는 걸까.
그 뒤엔 늘 같은 말이 있었다.
쉬면 뒤처진다.
통념 하나를 조용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문장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직접 배운 것도 아니고, 누가 나한테 앉혀놓고 가르쳐준 것도 아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이미 내 안에 있었다. 공기처럼. 당연한 전제처럼.
'쉬면 뒤처진다.'
이 문장을 처음으로 의심해본 건, 쉬지 않았는데도 뒤처졌다고 느낀 날이었다.
야근을 했다. 주말에도 노트북을 열었다. 잠을 줄였다. 근데 어느 순간 내가 만들어낸 것들이 다 비슷하게 생겨있었다. 새로운 게 없었다. 속도는 유지하고 있었는데, 방향이 어딘가로 흘러가버린 것 같았다.
멈추지 않았는데, 제자리였다.
이때 이상한 걸 발견했다. '쉬면 뒤처진다'는 문장이 사실처럼 느껴지려면, 뒤처진다는 말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나는 무엇 기준으로 뒤처진다는 걸까. 누구 기준으로. 어떤 속도 기준으로.
그걸 물어보면, 대답이 잘 안 나온다.
고립된 청년들이 드러낸 것
요즘 고립·은둔 청년을 다루는 이야기들이 사회적으로 천천히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청년재단의 '이음프로젝트' 같은 곳에서 이 청년들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를 세상에 공유하는 방식으로 인식을 바꾸려 한다. (출처: 한국IT산업뉴스)
처음 이 뉴스를 봤을 때, 나는 뭔가 불편했다. 왜인지 한참 생각했다.
고립된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대부분의 서사는 비슷한 방향으로 간다. 세상에서 낙오됐다, 뒤처졌다, 연결이 끊겼다. 그 사람들을 '다시 사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목표처럼 그려진다.
근데 잠깐.
그들이 멈춘 게 잘못인가, 아니면 멈출 수밖에 없게 만든 무언가가 있었던 건가.

'멈춤'을 낙오로 읽는 시선이 있다. 그 시선이 아주 오래됐고, 아주 자연스럽게 내면화돼있다. 그래서 멈춰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볼 때, '나는 지금 쉬고 있다'가 아니라 '나는 지금 뒤처지고 있다'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자기인식이 사람을 더 깊이 가라앉힌다.
뒤처진다는 것의 기준은 누가 만들었을까
경쟁에는 방향이 있어야 한다. 달리기라면 결승선이 있어야 하고, 등수가 있어야 하고, 기준이 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근데 어른이 된 뒤의 경쟁이라는 건 결승선이 없다. 트랙도 자꾸 바뀐다. 이기고 나면 더 높은 게 기다리고 있고, 도착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 게임에서 '뒤처진다'는 건 정확히 어떤 상태일까.
착한 사람이 참아야 한다는 말, 나는 그게 늘 이상했다를 쓰면서도 비슷한 감각이 들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말들 안에 뭔가가 숨어있다는 느낌. '참아야 한다'도 그렇고, '쉬면 뒤처진다'도 그렇고 — 이 문장들은 규칙처럼 보이지만, 규칙을 만든 사람이 없다. 출처를 물으면 아무도 모른다.
출처 없는 규칙이 제일 강하게 작동한다. 의심할 수가 없으니까.
'쉬면 뒤처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쉬지 않으면 반드시 앞서게 된다는 말도 사실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쉬지 않는다고 앞서는 게 아니라는 걸. 쉬지 않으면 그냥 쓰러진다는 걸.
그러면 이 문장은 참이 아닌 게 된다.
근데 왜 우리는 계속 이 문장을 믿는 걸까.
이 글을 여기서 멈추는 이유
한국에서 고립된 청년들을 돕는 프로그램이 1대1 방문 상담, 심리·정서 회복, 체험활동을 제공하고, 그 이후에도 밀착 관리를 한다고 한다. (출처: 뉴스핌) 그걸 읽으면서 나는 한 가지를 계속 생각했다.
저 사람들이 멈춘 것은 약해서가 아닐 수도 있다. '쉬면 뒤처진다'는 명령을 버티다 버티다 몸이 먼저 멈춰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진짜 문제는 멈춘 사람이 아니라, 멈추면 탈락이라고 말하는 구조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 구조가 우리한테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가 궁금하다.
목 뒤쪽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모니터 불빛이 눈을 누른다. 물 한 잔을 마시러 일어나는 것, 딱 그 정도를 지금 하려고 한다.
그게 뒤처지는 일인지 아닌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아무 이유 없이 쉰 게 언제였나요?
📎 참고한 자료
- 고립·은둔 청년 지원 사회적 과제 확산 관련 보도 (트리플라잇)
- 고립 청년 대상 1대1 방문 상담·심리회복 프로그램 안내 (뉴스핌)
- 청년재단 '이음프로젝트' 확대 운영 및 인식 개선 활동 (한국IT산업뉴스)








